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감독 : 빅터 플래밍
주연 : 비비안 리(스칼렛 오하라 役), 클라크 케이블(레트 버틀러 役),
레슬리 하워드(애슐리 윌키스 役), 올리비아 드 하빌란드(멜라니 헤밀튼 役)
누군가 내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단 1초도 생각할 겨를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단숨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반사적인 반응과 달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보다 훨씬 더 감명깊게 본 영화는 얼마든지 많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감동적이다 라는 느낌을 받은 첫번째 영화이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생에 처음으로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땐 다분히 길고 지루한 영화일 뿐이었다. 이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꽤 유명하단 사실을 알게 된 뒤,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다시금 본 영화는 그야말로 내게 폭풍감동을 안겨주었다. 당시의 나는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며 보기에는 너무 어렸고, 오로지 스칼렛과 레트의 사랑만이 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워낙 TV에서 방영을 많이 해 준 덕분인지, 아님 감동의 깊이가 그만큼 깊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후반부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후반부에서 보여주었던 스칼렛의 이미지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속의 스칼렛은 가슴이 먹먹해질만큼 가련했다. 애슐리만을 바라보는 스칼렛의 이기적이고 미련한 사랑때문에 상처받는 레트를 생각하면 그녀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레트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러우면서도 너무 안쓰러웠다.
딸 보니와의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레트를 향해 환하게 웃음짓던 스칼렛의 미소..... 그건 레트를 향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레트의 조소와 비아냥거림에 곧바로 마음을 감추어버리는 그녀... 그리고 레트와의 자존심 싸움끝에 아이를 유산한 스칼렛은 슬픔속에서 레트를 찾다가 이내 그만둔다. 그때 그녀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레트라도 그녀를 찾아가 함께 아픔을 나누었더라면....
이후 레트와 스칼렛 사이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보니와 멜라니의 연이은 죽음은 레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언젠가는 스칼렛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묵묵히 기다리던 그였지만, 애슐리만을 향한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은 결국 그를 지치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속에서 그 고통속에서 그가 이겨낼 수 있던 건 그녀를 쏙 빼닮은 딸 보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트에겐 딸 보니가 곧 스칼렛이었다. 그런 그에게 보니의 죽음이란 스칼렛을 잃는 것과 같았으리라. 게다가 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며 힘이 되주던 멜라니마저 죽고, 그런 멜라니의 죽음 앞에서도 애슐리의 곁을 지키는 스칼렛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속엔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스칼렛은 뒤늦게 애슐리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멜라니였음을...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레트임을 깨닫지만, 이미 돌아선 레트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다. 스칼렛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면... 레트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둘의 엇갈린 사랑에 내 가슴이 다 까맣게 타는 듯 했다.
레트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스칼렛은, 금새 기운을 차리고 내일을 기약한다.
"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 장면은 내겐 너무나 아쉽기만 한 장면이었다. 내내 이 장면을 생각하며 레트가 스칼렛의 사랑을 받아주었더라면 하고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바람을 담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속편인 듯한 드라마를 보게됐지만, 워낙 비비안리와 클라크 케이블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인지 스칼렛과 레트로 나오는 배우의 비쥬얼에 크게 실망해서 보다 말았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처음 보았던 폭풍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콧대높은 오만함까지도 사랑스럽게 보이던 스칼렛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시 만난 스칼렛은 너무나 사악하고 교활했다. 애슐리와 멜라니의 결혼에 대한 반감으로 멜라니의 남동생이자 애슐리 여동생의 약혼자인 찰스를 빼앗고, 돈 때문에 친 여동생의 약혼자를 빼앗는 그녀는 같은 여자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 결혼이었다 해도 배우자들의 죽음앞에서 조차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나를 아연실색케 했다. 한편으론 그렇게 남의 눈치 안보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줄 아는 그녀였기에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꿋꿋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도 눈물도 잠깐, 금새 훌훌 털고 미래를 생각한다. 오죽하면 결혼한 애슐리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스칼렛의 강인하면서도,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은 전쟁의 참혹함을 견디는데 있어서 더할나위 없이 완벽했다. 갓 출산한 멜라니와 아기를 데리고 황폐해진 고향 타라에 돌아왔을 땐 버려진 소를 보자마자 이내 우유를 짜낼 생각을 하고, 물건을 훔치러 집으로 들어온 북부 군인을 죽인 후엔 그의 주머니를 뒤져 금품을 챙길 생각을 하고,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종전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기 보다 앞으로 뛰어오를 목화값을 생각하고.... 그녀의 섬뜩하리만치 영민한 두뇌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어려움속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남부의 시각에서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목화농업이 주인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북부에서 흑인노예해방을 부르짖을 만큼 흑인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없었음을 말하려는 듯, 기가 센 스칼렛이지만 흑인 유모의 말에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죽은 아버지의 시계를 흑인 남자하인에게 준다거나 하는 모습을 통해 흑인들과의 유대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뒤늦게야 진실한 사랑을 깨닫지만, 그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그 애통한 슬픔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고향 타라를 떠올리는 스칼렛의 모습을 통해 잡초처럼 강인한 남부인의 기질을 강조하려는 듯 하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러기위해서는 역시나 레트와 스칼렛의 이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겠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작가인 마가렛 미첼이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 태생이다 보니, 남부의 모습이 미화될 수 밖에 없던 듯 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북부의 승리로 인한, 그들에 의해 쓰여진 역사에 안타까움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요즘들어 예전에 감명깊게 봤던 영화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예전에 느꼈던 그때의 그 진한 감동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되어 또다른 감동을 얻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내 마음의 어디가 굳어버린 걸까?? 분명 잃어버린 감정들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들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님, 그냥 내가 변해버린 걸까?? 싫다... 변해버린 나를 인정하는 건 너무 서글플 것 같다.
툭툭.. 내 심장을 향해 던지는 감동의 돌덩이를 맞고 싶다. 그 무게를 느끼고 싶다. 지워지지 않는 진한 멍이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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