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이후 “바나나”)와의 첫 인연은 「하드보일드 하드 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하드보일드의 뜻도 모르면서 그저 단어 자체가 주는 시크한 느낌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었는데, 특히나 뜻을 알고나서는 더욱 좋아졌다. 하드보일드야말로 내가 지향해 가야 할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사소한 것 하나에도 마음을 쉬 다치고, 그로인해 삶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유약한 내게 꼭 필요한 지침서같았다. 어설픈 감상 따위에 젖어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매사에 그 어떤 시련이나 고뇌 앞에서도 상처받지 않는, 좌절하지 않는, 아주 단단한 심장을 만들어줄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분명 하드보일드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난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다. 심장이 겉만 단단해진 것 같달까??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쇠창살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심장을 뚫고 안으로 훅~하고 파고들어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부작용인지 서서히 심장이 굳어가면서 잃고싶지 않은, 잃지 말아야 할 필수(?) 감정들까지 응고되어가는 것 같다. 딜레마..?! 나는 과연 지금 이대로 하드보일드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본 책은 하나의 소설이 아닌,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으로 나뉘어 있다. 첫번째 「하드보일드」는 혼자 떠난 주인공이 여행길에 겪게 되는 기묘한 하룻밤의 이야기다. 앞서 말한 것 같은 내가 지향하는 의미로써의 극단적인 하드보일드의 뜻을 담고 있지는 않고, 좀 더 따뜻하고 긍정적인 느낌의 또다른 하드보일드가 느껴지는 이야기다. 내가 제목이나 글의 중심 주제와는 별개로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겪는 기묘한 일들이 주는 특별함과 신비로움,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과 동경때문이다.
숲에서 본 사당 안에 있던 불길한 느낌의 검은돌이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안에 딸려오고, 그 돌을 여관의 목욕탕 욕조 안에서 다시 보게 되고, 꿈에서는(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쯤 될까?) 죽은 친구를 만나고, 현실에서는 죽은 영혼을 실제로 만나고, 여관 아주머니로부터 그 영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고.. 등등 주인공의 영적인 교감들이 참 흥미로웠다. 이후 바나나의 다른 작품속에서도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바나나 특유의 그런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난 참 좋다. 마치 우리네 삶 어디선가 어느 누군가가 직접 겪었다는 초자연적인 경험담을 듣는 기분이랄까? 오컬트적인 느낌은 두번째 이야기인 「하드 럭」에서도 역시나 이어진다. (「하드 럭」은 뇌사상태에 빠진 언니를 둔 동생의 이야기로, 언니에게 생전에 좋아하던 귤 냄새를 맡게 해주자 언니가 그 냄새에 깨어나는 짧은 환영을 보는 부분이 나온다.)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 두 이야기는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하드보일드」는 한때 한 집에서 연인처럼(?) 지냈던 동성의 절친을 갑작스런 사고로 잃은 여주인공의 이야기이고, 「하드 럭」은 자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성간의 유대관계를 그리고 있으며, 각기 다른 별개의 이야기지만 “죽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이(각각 절친과 언니)의 죽음을 딛고 자신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는 치유와 성숙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나나는 그 과정으로 나아감에 있어 남겨진 자와 죽은 자가 교감을 나눌 수 있도록 -바나나의 표현을 빌자면- 뒤틀린 시간이란 기묘한 시공간을 이용한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오컬트적인 요소가 「하드 럭」에 비해 좀 더 강한 것 같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던 이십대 초반에는 「하드보일드」를 더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하드 럭」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더 많았다. 「하드보일드」에서 그려진 "죽음" 은 기묘하고 몽환적인 느낌인 강한 반면, 「하드 럭」에서의 "죽음"은 보다 현실적이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꽤 진중하게 다가왔다.(그만큼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가장 가까운 가족(언니)의 죽음을 그렸기에 공감의 깊이 또한 보다 깊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특히 좋았던 것은 동생의 추억속에 담긴 자매의 모습이었다. 어린시절 서로의 방으로 이불을 끌고 가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언니의 첫사랑 남자 집 앞으로 찾아가 함께 그 집 창문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엔 둘이서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들으며 밤길을 걷고... 그 추억담이 너무 예쁘고 애잔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동성의 형제에 대한 부러움에 동경심이 일기도 했다.
옮긴이(김난주)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란, 타인의 죽음이란 <불운 Hard Luck>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늘 죽은 사람의 불운과 빈자리를 껴안고 <하드보일드Hard-boiled> 하게 살아야 하는 숙제가 남습니다.”라고..
어쩌면 책 제목을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 사이에 따로 쉼표를 두어 구분하지 않은 이유 또한 옮긴이가 말하고 있는 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속의 하드보일드는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영위해 나가기위해 도약한다는 무한 긍정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해서 그런 순기능의 하드보일드한 마인드를 가질 수는 없다. 내게는 오직 나만의 맞춤형 하드보일드 마인드가 필요하기에.. 아무리 데미지가 크더라도 감수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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