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예전 일드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최근 일드에도 관심 좀 가져볼까 하고, 지난달에 1분기 일드 목록을 검색해 봤는데, 몇몇 눈에 들어오는 드라마가 있었다. 게중에서 첫번째로 선택한 것이 「속죄」였다. 시놉시스도 마음에 들었지만, 총 5부작으로 일반 일드의 반 분량밖에 안되는데다가, 이미 종영이 됐다기에 가볍게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드라마는 시종일관 화면가득 무거운 공기가 잔뜩 깔려있고, 차분한 흐름 가운데 어두운 전조가 느껴졌다. 그동안 트렌디 드라마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기에 일말의 웃음기도 없는 무거운 분위기의 드라마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바짝 곤두선 긴장감이 내 안의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무딘 세포들을 죄다 깨워 일으킬 정도로 몰입도는 최고조였다. 늦은 밤이라 한 편만 보고 자려던 나는, 멈출 수 없는 호기심에 결국 내리 다섯 편을 몽땅 보았다. 그것도 스마트폰으로 긴 로딩시간과 중간의 끊김을 인내해가며 3g 동영상으로...
어느 작은 시골마을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드라마는 그 살인사건에 얽힌 다섯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각의 제목은 프랑스 인형(사에), PTA 임시총회(마키), 곰남매(아키코), 열달 열흘(유카), 속죄(아사코)이다. 이는 책도 마찬가지 형식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학교 운동장에는 다섯 여자 아이가 공놀이를 하고 있다. 사에, 마키, 아키코, 유카, 그리고 에미리... 이때 한 남자가 아이들 곁으로 다가와서는 환기구 수리를 도와달라며, 그들 중 에미리만을 지목하여 데리고 간다. 그 후, 에미리는 주검이 되어 네 아이들에게 발견되고...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지만, 네 아이 모두 분명 범인의 얼굴을 봤음에도, 그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엄마인 아사코는 네 아이들에게, 이후 그들의 삶을 속박하게 만들 무시무시한 말을 퍼붓는다.
“ 이제 지긋지긋해.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요,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요만 반복하고... 너희들이 멍청하니까 반년이 넘었는데도 범인이 잡히지 않는 거야. 나는 너희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찾아내. 아니면 내가 납득할 만한 속죄를 해. 그것이 완료될 때 까지 나는 일 분 일 초도 너희들 한 명 한 명을 잊지 않을 거야. 너희들은 이 속죄에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 각오해둬! ”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들에게 속죄를 하라니... 아사코는 아이들이 일부러 거짓말이라도 한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그 속죄를 받기 위해 성인이 된 아이들을 찾아다닌 걸까?? 그리고 아이들은 왜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바로 코앞에서 짧지만 대화까지 나누었으면서.... 살인현장을 직접 본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가??....... 에미리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아사코의 말에 속박되어 살았던 걸까??
어쩌면 드라마에서는 빠졌지만, 책속에는 내가 찾는 답이 있을지도 몰라... 만약, 그녀가 아무런 이유없이 그저 아이들에 대한 야속함만으로 그런 말을 한 거라면, 아이들이 아무 이유없이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그 이유를 책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면, 드라마를 보며 내가 느낀 파격적인 감동(?)이 그 의미를 잃고 물거품이 되어 버릴 터였다. 나는 이러한 나의 답답함을 해결코저 곧바로 책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달려갔지만 하필 대출 중이었다. 바로 예약을 하려 했더니, 앞서 대기자까지 있었다.
' 뭐야?? 이 책... 왜 이렇게 인기야?? 나처럼 드라마를 보고 나서 원작에 관심이 생긴 건가?? 그럼,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거야?? '
어쨌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2주가량이 지나서야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책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틀에 나누어 보긴 했지만, 딱 두 번에 걸쳐 다 읽었을 만큼. 틀림없이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나올 거야! 라는 기대감도 한 몫을 했지만, 드라마와는 또 다른 느낌에 쉼 없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납득할만한 이유 같은 건 책에도 없었다. 그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긴 하지만.(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 근거 있는 이유 따윈 없어야 했다는 것에 이해는 했지만, 개인적인 사고와 판단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드라마에서는 네 아이들이 에미리를 시샘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단순히 도쿄에서 전학 온 부잣집 도시아이가 지닌 세련됨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에미리는 그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에미리는 사에가 갖진 못한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고, 전학오기 전까지 쭈욱 리더의 역할을 해오던 마키의 주도권을 의도치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빼앗아갔으며, 지독한 자기비하감에 시달리던 아키코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겐 없는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인간의 모델로서, 세상의 불평등함과 자신의 분수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만든 존재였다. 또한 에미리는 유카를 도둑으로 오해해놓고도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콤플렉스는 에미리와 닿아있었고, 그런 에미리의 죽음 자체만으로도 힘겨운 아이들에게 아사코의 말은 직격탄이 되어 트라우마를 낳아, 결국 그들의 인생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들은 속죄의 대가로 자신들의 불행과 함께 사건의 단서를 아사코에게 전해주고, 그녀는 그 단서들을 통해 범인의 윤곽을 더듬어간다.
마침내 드라마에서 진실이 밝혀지던 그 순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히 자기본위적인 아사코의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였다. 그런 느낌은 책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드라마속 마지막 장면의 아사코에게서는 결코 속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에 인생의 방향을 잃고 고뇌하며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책 속의 아사코는 달랑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에 대해 고백하고 범인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 만으로 속죄를 했다고 믿는 듯한, 아이들에게 용서를 바라는 듯한 모습은 지독히도 자기본위적이었다. 하긴 그런 인간이니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독기를 내뿜을 수 있었던 거겠지...
아사코외에도 드라마와 책이 주는 아이들의 느낌은 조금씩 달랐다. 그 중에서 드라마속 아키코만이 가장 책과 근접한 느낌을 주었고, 나머지 세 명의 느낌은 좀 많이 달랐다.
사에의 살인동기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그 의미가 빠져서인지 솔직히 그녀의 살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키 역시 책에서는 수긍이 가던 그녀의 적절한 대처법(?)이 드라마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과장됨으로서 공포감은 살렸을지 모르나 역시나 공감은 부족했다. 유카 역시 드라마에서는 거북스러울 만큼 너무 비도덕적이고 음흉해 보였다.
유카... 그녀는 네 아이들 중 가장 강인했다. 아사코의 말에 유일하게 속박되지 않았을 만큼. 아사코와 대면했을 때도 그녀는 당당했으며, 그녀를 향한 적개심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드라마에서는 바로 그 이유를 그녀가 지닌 비도덕성과 음흉함에서 찾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그 부분을 더욱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듦으로서 속죄를 한 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책은 그 불행의 원인은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고 그들의 속죄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알아낸 것이란 생각을 들게 했다.
굳이 책과 드라마 중 어느 것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책이라고 답은 하겠지만, 책은 너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보니 유추의 재미가 살짝 반감되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주인공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형식으로, 사건 당시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과 그 상황속에서 그렇게 행동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변론해야 하다보니 자세히 설명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드라마에서는 아사코가 아이들에게 한 말이,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자기본위적인 아사코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 같아 가장 인상 깊었다면, 책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에미리가 살해되던 날... 자신의 딸이 피해자가 아님에 안심하던 마키 엄마의 한마디.
“우리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아키코로부터 에미리가 죽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사코가 내뱉던 말.
“왜 하필 에미리냐고.”
각기 다른 입장에 선, 이 두 엄마의 상반되는 말이 어찌나 씁쓸하면서도 거북스럽던지...
나 역시 인간이기에 자기본위적일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런 인간의 본성에 지독한 경멸과 치욕을 느낀다. 하지만 자기본위야말로 개개인을 지탱하는 근본이 아니던가. 이러한 생각자체도 자기본위에서 나옴인 걸...
그리고 지금껏 나의 자기본위적인 행동과 말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평소 말하는데 있어 상대방을 배려해 신중을 기하려고 최대한 애쓴다지만,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다른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독이 되지는 않았을지... 같은 말이라도 내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 다른 누군가에겐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 만큼 크나큰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한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그러기에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이 그런 상처에 강해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100%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해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 애써야 하지 않을까?? 그것조차 자기본위적이라 할지라도...